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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종이비누 2022. 12. 14. 12:05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


                                                                                           
                                                                                                      신경숙


지금부터 제가 하려는 이야기를 선생님이 믿어주실까요?


사실은 저도 오늘 병원에 다녀오기 전까지 두 달 전 새벽에 일어난 일이 사실이었는지 환영이었는지 잘 분간이 안 갔습니다.
시시각각 기분에 따라 사실이었던 것도 같고 환영이었던 것도 같고 그랬으니까요.
제 옆에 남편이 같이 있지 않았다면 저도 제가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거예요.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나 선명했어요.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그 겨울밤에 일어난 일을 잊고 지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라고 느껴지면 마음의 동요가 일었고 환영이었나 싶으면 마음이 일순 고요해지곤 했어요.
그러는 사이 벌써 봄이 오려나봅니다. 그날 밤 눈보라에 뿌리째 뽑힐 것같이 휘어지던 모과나무에 반짝반짝 윤이 나기 시작합니다. 봄 산을 수놓을 다년초 풀들이 지금쯤 눈 속에서 계곡물 소리를 듣고 있겠군요.
벌깨덩굴이나 참꽃마리들이요, 애기풀이나 흰땃딸기가요.


일어나 잠시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다시 눈발이 비칩니다.
아침부터 종일 그쳤다가 다시 내리고 그쳤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합니다.
삼월의 때늦은 눈이 괜히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군요. 미당이셨지요?
눈은 내리면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하며 내린다고 하셨던 분이?
지금은 제목을 잊었지만 한때 그 시를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잊었다가도 눈만 내리면 저절로 떠오르는 구절이었어요.
지금 내리고 있는 저 눈이 저에게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고 하면 웃으시겠지요?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인생이든간에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가 없는 모래펄이
존재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왔습니다. 제게도 분명 그 모래펄이 있고 제 모래펄 안으로는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다고 말이지요.
이렇게 저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저 자신을 표현해보려고 애쓰는 것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눈이 내리면은요. 세상에 눈이 하얗게 쌓이는 걸 보고 있으면 이상한 일이지요.
어김없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하는 시 구절이 말씀처럼 떠오르고 상실이나 결핍이 일구어놓은 그 모래펄조차도
하얗게 눈으로 메어지는 것 같습니다.


, 제 소개가 없었군요.
저는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지만 선생님은 저를 전혀 모르시는데 인사도 없이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제 이름은 김희수이고 나이는 서른하나, 결혼하기 전에는 출판사에서 일했습니다.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선생님이 쓰신 글을 제가 교정을 본 적도 있답니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라는 짧은 글이었는데 혹 기억나시는지요? 제가 다닌 출판사의 홍보 책자에 실린 글이었는데,
오래 전 일이라 잊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이 글의 수신인을 선생님으로 정한 것은 선생님이라면 아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은 제 이야기를 믿어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언젠가 선생님은 갑자기 남편을 사별한 어느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셨지요?
남편의 유골을 모셔놓은 절집에 그 여인이 도착할 때마다 바람도 안 부는데 절집 처마에 매달려 있는 풍경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때면 그 여인은 마음속으로 남편의 이름을 불러보지요.
그러면 바람도 안 부는데 풍경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선생님은 그 풍경 소리에 그 여인의 남편의 혼이 실려 있다고 생각하신 거지요?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선생님도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개개인이 보는 가장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고귀한 것,
속에는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거라고 말이지요.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면
선생님은 이 천지간에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믿고 계신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분명 선생님은 두 달 전에 제게 생긴 일을 믿어주실 것이다,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병원에 다녀오면서 꼭 선생님께 그날 밤의 일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그날 밤에 먼저 잠을 깬 게 자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저는 이미 깨어 있었어요.
진눈깨비의 기척 때문이었지요. 이 년 전에 태어난 지 칠 개월 된 딸아이가 수두 하나를 이겨내지 못하고 깊은 밤중에
세상을 뜬 후로 저는 산을 벗 삼아 우리나라 어디든지 돌아다녔습니다.


딸아이는 면역성 결핍 체질로 태어났어요.
뿐만이 아니에요. 오른쪽 겨드랑이에 귀 모양의 날개도 달려있었답니다.
종종 그런 아이들이 태어난다고 해요.
의사는 아이가 조금 성장하면 수술을 해서 날개를 제거할 수 있는데, 제 딸아이는 체질이 그래서 수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염려했습니다. 처음엔 좀 징그러웠지만 날개라고 여기니 곧 괜찮아졌어요.
아이가 성장하는 것과 같이 날개도 자라나지 않기만을 바랐지요. 딸아이에게 치명적인 건 그 날개가 아니라 감기라고 했어요.
우리부부에겐 아이가 오로지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무진 애를 쓰며 살았던 칠 개월이었습니다.
가습기를 두 대씩 가동해서 언제나 방안의 습도를 맞추었고, 바깥에서 돌아오면 손을 씻고 입을 헹구고 옷을 다 갈아입었으며,
창문을 열지 않고 공기를 바꾸기 위해 부엌에서나 사용되는 환풍기를 창문 옆에 달았지요. 딸아이에게 찾아온 건 감기가 아닌,
뜻밖의 수두였습니다.
딸아이의 몸은 어느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열꽃이 피었어요. 손들과 귀밑까지요. 다른 아이들은 간단한 주사 한 대로 이겨내는 수두 앞에서 특이 체질이었던 아이는 맥없이 갔습니다
.
여기까지 쓰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군요.
그 동안 저는 딸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분홍색 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옹알이를 마치고 어…………하던 딸아이를 잃었다는 것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아는 것조차 극도로 꺼려왔습니다.
아이를 잃고 찾아왔던 슬픔이라고 말하기도 고통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마음의 공황 상태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요. 이후 남편은 제 앞에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질 않았습니다.
내면은 어떠할지라도 남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기 할 일을 했습니다. 얼핏 변한 게 없었어요.
두 달에 한 번씩은 아버님 혼자 살고 계시는 물치를 방문했고, 돌아올 때는 포구에 들러 오징어나 한치 말린 것들을 사가지고 오는 것까지 아이가 살아있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면목동 큰형님 댁에서 지내는 제사에도 참석했고, 일 년에 상반기 하반기로 있는 부부 동반의 초등학교 동창회에도 꼬박꼬박
나갔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마다 늘 옆에 있던 제가 없었다는 것이겠지요.


저는 남편이 집을 비우게 되면 산으로 갔습니다.
산이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산에 가면 억눌렸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지치나 앵초의 생김새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차츰 남편이 집에 있는 일요일 같은 때도 등산모임을 따라 산을 돌아다녔습니다.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딸아이를 잃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회사에 충실하고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고 가족 모임에도 변함없이 얼굴을
내미는 남편이 견딜 수 없어졌어요. 일요일에 적막한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의 옆모습을 부엌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뭔지 모를 분노 같은 게 솟아올랐어요.
아침마다 어김없이 거울 앞에서 전기면도기 소리를 내며 면도를 하고 있는 남편이 한없이 멀리 느껴졌지요.
그런 마음이 쌓이다 보니 자연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도 싫어졌고, 몇 번 실랑이를 번인 후론 남편 또한 제 몸에
손을 대는 일이 없어졌으며, 어느 날부턴가 서로 각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점점 그와 나 사이에 대화는 사라졌어요. 거의 말없이 지냈지요. 모든 일을 변함없이 덤덤히 이어나가고 있는
남편에게 제 마음의 공황상태를 드러내지 않으려다 보니 점점 더 그렇게 되었지요.
처음부터 차라리 네 탓이거나 내 탓이라고 하면서 할말 못할말 다 내뱉고 한바탕 울기라도 했더라면
그토록 냉랭한 사이로 변하진 않았을 거예요. 우리의 대화라는 것은 남편이 회사 일로 출장을 가서 전화를 걸어오면
별일 없어? . 내일 갈게! .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차츰 남편은 삼사 일씩 집을 비워도 전화 따윈 하지 않게 되었지요.
, , 하고 말거나 아니면 아예 받지도 않는 전화를 그이인들 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출장지에서 스카프나 소라 껍데기 혹은 손목시계 같은 걸 내 선물로 사와서 식탁 위에 얹어놓곤 했지요.
뭔가에 홀린 듯이 겨울 산을 찾아 돌아다니는 저를 위해 모자라든가 국방색 면장갑 혹은 아이젠 같은 걸 사오기도 했어요.
한번은 산에 같이 갈까? 물었습니다. 저는 싫다고 했습니다. 딸아이를 잃은 일 년 후에 남편은 쉰 명 중에 세 명이 뽑히는 진급시험을 통과해 승진도 했지요. 남들은 희망퇴직이다 뭐다 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데 비해 남편은 오히려 안정되어갔습니다.
얼마 전 남편은 헤드헌터로부터 스카우트 되어 인터넷 뱅크라는 벤처 회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샐러리맨이 비전이 없고 연봉이 육백만 원이나 세다는 점, 이익이 나는 대로 주식으로 되돌려 받는다는 이유가
남편의 마음을 바꾸게 한 것 같았습니다.
사표를 쓰는 남편을 저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어요.
우리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래를 설계하는 그 사람이 저는 제 남편 같지가 않았어요.
새 회사로 옮겨가면서 정식 출근 하루 전에 업무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 새 사무실에 나갔다 온 남편이,
이제 내 생활 태도를 백팔십도 바꿔야 될 것 같아.
단 몇 시간이면 이미 늦어지는 정보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지금보다 훨씬 압축시켜서 살아야 할 것 같아,
했을 때 저는 그건 당신 일이에요, 단 한마디로 남편의 말을 묵살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지요.
어쩌면 저렇게 태연히?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끔씩 만나던 친구들과조차도 연락을 끊고 살았지요.
딸아이가 태어날 때 병원이며 조리원에 딸아이가 목욕할 통이며 베이비분이며 세 살이나 되어야 신길 수 있을 것 같은
신발 등을 사가지고 찾아왔던 친구들과 마주앉아 딸아이의 얘기를 피해 다른 잡담을 나누며 차를 마셔야 하는 일이
저는 두려웠어요. 가족 모임에도 어디에도 가지 않게 된 것 또한 같은 연유였지요.
제 앞에선 태연히 웃어도 속으로는 동정하겠지, 싶은 게 점점 더 저를 혼자 있게 만들었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대신 저는 산을 찾아다녔습니다.
이전에 산을 좋아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산에 이끌렸어요.
내설악이며 오대산, 조계산, 마이산 운악산, 무등산, 내장산, 계룡산, 소록도의 팔영산까지 돌아다녔지요.
저번 가을은 아예 산에서 살았네요. 1 2일이나 2 3일 일정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산악회를 따라 산행을 나섰고,
그러지 않은 날에도 새벽에 일어나면 남편이 먹고 출근할 수 있게 간단히 아침을 식탁 위에 차려놓고
저는 배낭에 유자차나 귤 몇 개를 넣어 메고 산으로 갔습니다. 새벽 버스를 삼십 분쯤 타고 구기터널 앞에 내려
북한산으로 들어가는 등산로를 탔지요. 올 겨울은 눈이 참 많이 오네요. 겨울이 되면서 눈 오는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북한산을 올라갔지요. 남편이 사다준 아이젠 따위는 등산화에 부착하지도 않은 채로요.
딸아이가 우리 곁은 떠나가던 그날 밤중에도 눈이 내렸지요. 분홍색 손가락을 힘없이 떨구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새같이 조그만 아이하고는 아랑곳없이 눈은 하염없이 내렸습니다. 저는 남편이 죽은 딸아이의 파들파들 떨던
그 조그만 몸을 어떤 절차에 의해 장례를 치렀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그리 된 직후 나는 언니네 집으로 가서
보름쯤을 누워 있다가 돌아왔지요. 언니는 남편이 불렀고 아이의 장례는 남편 혼자 치렀어요.
저는 여태 죽은 아이를 어떻게 했는지 남편에게 묻지 못했습니다.
저는 묻고 남편이 대답하고 나면 우리 사이는 그것으로 끝장일 것만 같았거든요.
저는 딸아이에 대한 물음을 가슴에 품고 산으로만 돌아다녔습니다. 특히 겨울 산을요.
겨울 산에 애착을 가졌던 것은 겨울 산이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유야 여하튼 저는 태어난 지
칠 개월밖에 안 되는 자식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어미인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책은 조금씩 더해졌고,
눈 오는 날이면 최고치에 도달했습니다. 눈이 쌓인 산속으로 떠날 때마다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닫았지요.
마당의 모과나무를 한번 쳐다보고 산으로 갔지요.
눈에 덮인 바위나 얼어붙은 계곡에 처박히길 꿈꾸면서요.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알피니스트가 쓴
죽음의 지대라는 책을 경전처럼 품고 다녔습니다.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 죽음의 지대라는 극한 영역에서는
거의 불안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한계 영역에서 생이 새로운 차원으로 인식된다고 하더군요.
나와 세계가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있다는 감정까지 발생한답니다. 한계 영역에서 존재의 차원은 더 넓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이겠죠. 알피니스트들이 부상당한 몸을 일으켜 다시 산에 오르고, 추락하면 다시 회복시켜 또 산에 가는 까닭이오.
저는 자연의 최고 지점에서 저를 느끼고 싶은 게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도중에 추락이나 부상을 원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상태를 원했어요. 하지만 이상한 이이었습니다.
산에만 가면 입 안의 따뜻한 혀처럼 온몸이 죄다 따뜻해지곤 했습니다. 거짓말 같게도 저는 산에서,
꽁꽁 얼어붙은 산에서 미끄러지는 법조차 한번 없었어요. 눈이 자주 내리면 쌓인 흰 눈 밑에 얼음이 반질반진하게
숨어 있게 마련인 골짝길에서도 저는 엉덩방아 한번 안 찧었어요. 눈이 내리고 산속에 눈이 수북이 쌓이면 대부분 산은
누구도 지난 적이 없는 처녀지가 되지요. 러셀 자국 하나 없는 눈 쌓인 길에 발자국을 찍으며 산을 오르다 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요. 때때로 그대로 숨이 멎을 것 같기도 한데 넘어지는 법은 없었어요.
오히려 산은 제가 사각사각 눈을 밟으며 올라오도록 왼쪽오른쪽에서 저를 보호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늘이 보이는 널찍한 고갯마루가 나오면 거기 눈 위에 누워 하늘을 보기도 했습니다.
봉우리에 도착하면 맨 먼저 흰 눈 위에 딸아이의 이름을 새겨 놓곤 했지요.
이번 겨울에도 그 아이의 이름을 열 번도 넘게 눈 위에 새겼습니다. 간혹 너를 잊지 않았다, 고 덧붙여 쓰기도 했지요.
청량산의 연주봉에 금암산의 눈에 덮인 기암괴석 위에, 문수산의 병풍바위에, 태백산의 연화봉에요.
그렇게 눈 덮인 봉우리에, 바위에 딸아이의 이름을 새기는 동안 저는 겨울 산과 아주 친해졌고,
눈 내리는 기척에도 아주 민감해졌습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 광덕고개를 출발했다가 폭설로 인해 도중에
광덕농장 쪽으로 피신했었지요. 쉬었다가 다시 칼바위를 지나 복계산의 수피령까지 꼬박 사흘 밤 나흘 낮이 걸렸지요.
산 전문가인 일행 셋을 따라갔으니 가능했지 혼자서는 꿈도 못 꿀 구간이었습니다. 고도 위에선 정말 겁이 나더군요.
산위의 나흘 동안 눈은 멈추는가 하면 또 내리고 또 내리고 했죠. 눈과 벌인 싸움은 정신을 아찔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눈 표면은 햇빛과 바람에 얼마간 굳어 있었지만 그 안은 눈가루 상태였어요. 뭐랄까요.
고운 밀가루 같은 흰 눈가루 위에 얇디얇은 비닐을 얹어놓은 격이랄까요. 일행들이 몇 번씩 눈의 덫에 걸린 듯
허리까지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이상한 일이지요, 저는 괜찮았어요. 바람이 불어 눈보라가 파도치듯 했을 때도
저는 눈구덩이에 빠지지 않았지요. 눈빛에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 가 없는 때에도 어찌어찌 앞을 향해 걸을 수가 있었지요.
여기저기서 눈의 무게를 못 이긴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소리가 예사로 들렸지요. 흰 바위 뒤로 얼핏 노루가 숨는 것도 같고,
멧돼지가 걸어간 발자국도 보이곤 했지요. 저 또한 나뭇가지에서 연신 떨어지는 눈을 뒤집어써 백곰이 된 꼴로 종주를 마친 후론
어디에 있으나 눈의 기척은 알아채게 되었습니다. 부엌에서 파를 다듬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눈이 내리는 기척이 느껴지면
눈이 떠지곤 했습니다. 눈이 내리는군, 감지하는 순간 눈발에 희뿌연 하늘, 서쪽으로 동쪽으로 내리뻗은 산줄기마다
벌거벗은 낙엽송 위에서 핀 설화, 눈 위에 찍힌 삵의 발자국, 종내엔 산이 아니라 눈바다로 여겨지던 바람과 함께 일렁이던
눈의 자취들이 한순간에 떠오르곤 했습니다. 눈빛이 찬란한 눈 쌓인 산속에서 만나는 삵의 발자국은 남다릅니다.
한순간에 닭이나 오리의 목숨을 채갈 줄 아는 짐승의 발자국은 눈 위에 찍힐 때도 쌓인 눈을 채갈 듯이 찍혀 있곤 하지요.
그날 밤에도 저는 눈이 내리는 기척에 잠이 깼어요.
눈을 뜨고서 창문에 어른거리는 눈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바람이 부는지 눈 그림자는 어지러웠습니다.
창문에 어른거리는 눈 그림자를 보며 어둠 속에 누워 있는데 남편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방에서 나온 남편이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 시간에 어딜 가려는 걸까?
저는 어둠 속에 누운 채로 여전히 창문에 어리는 눈 그림자를 바라보며 남편의 기척에 귀를 곤두세웠습니다.
현관문이 보이는 밀창 앞에서 남편의 슬리퍼 소리는 딱 멈췄어요. 남편이 뭘 하고 있는지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그렇게 고요한 채로 삼사 분 가량이 지났습니다. 남편이 밀창을 여는 소리나 아니면 밀창 옆에 세워둔 신문꽂이 통에서
지난 신문을 뒤적이는 소리라도 내주길 기다리던 제가 그만 긴장이 되어 어지러운 눈 그림자에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반이나 일으켰지요.
 “여보.”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요. 나를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 여보.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라 정말
저를 부르는 소리인가 싶었지요. 무슨 일일까? 저는 궁금했지만 그대로 있었어요. 별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요.
슬리퍼를 끌고 현관 문 쪽으로 가는 소리만 들었지 뭘 깨뜨린다거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나가지 않자 좀처럼 그런 일이 없던 남편이 제가 자고 있는 방문 앞으로 걸어와 노크를 했어요. 제가 방문을 열자
남편이 물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 못 들었어?”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분명히 문 두드리는 소리였는데……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들렸는데…… 내가 그 소리에
잠을 다 깼는데……
  남편은 어둠 속에서 혼자 웅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잘못 들었겠지요. 이 시간에 누가……
  새벽 세시가 지나 있었습니다. 내 말투에 누가 이 시간에 문을 두드렸겠냐는 불평이 묻어 있었나봅니다.
남편은 약간 멋쩍었는지 머리를 쓸어올렸습니다. 흰색 체크무늬 잠옷 단추가 두어 개나 풀어져 있는 흐트러진 모습이었습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남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현관문을 쳐다봤습니다.
 “…… 문 두드리는 소리잖아!”
  저는 의아한 마음으로 그제서야 아예 불을 켜고 남편을 바라봤습니다. 밝은 빛 속에 드러난 남편의 눈빛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그래요?”
 “방금도…… 당신도 들었잖아!”
  저는 진정으로 염려가 되어 남편을 가만히 쳐다봤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진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그럼 문을 열어봐요!”
  남편은 잠시 주춤하더니 현관문을 향해 누구세요? 물었습니다.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까요. 남편이 약간 떨고 있는 것 같아 제가 밀창을 밀고 나가 현관문을 열어 제쳤습니다.
 “누가 왔다고 그래요?”
  눈보라가 치는 새벽이었어요. 문을 열자마자 마당에서 휘돌고 있던 거친 바람이 휘익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봐요…… 아무도 없잖아요.”
  저는 문을 조금 더 열어보였습니다. 문밖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마당이랄 것도 없는 네댓평 되는 뜰에 눈을 뒤집어쓰고 있던 모과나무가 금세 뿌리가 뽑힐 듯이 휘청거렸어요.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쏴아 쏟아져 내렸습니다.
 “눈보라치는 소리를 잘못 들었나봐요.”
 “……
  우리가 삼 년 전 대출에 의지해서 이 집을 구했을 때, 그때는 살아 계셨던 시어머니가 심어준 모과나무 밑에도 눈이 소복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쌓여 있던 눈들이 휘익휘익 펄럭이는 소리를 내며 마당을 날아다녔습니다. 제가 다시 현관문을 닫아 바람을 차단시켰을 때 남편은 슬리퍼를 끌며 뒷모습을 보이고 자던 방으로 가고 있더군요. 고개를 숙인 채, 한쪽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요.
제 방으로 돌아와 창문에 어른거리는 눈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동안 뒤척이다 설핏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이 찰박찰박거리는 소리가 제 귓속에 잠겼습니다. 처음에는 눈보라치는 소리인가 했지요. 그런데 분명 욕조에 받아놓은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였어요.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어요. 남편이 목욕을 하나, 싶었다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내는 물소리는 아니었거든요. 남편은 샤워기를 틀어놓고 그 밑에서 샤워를 하는 것으로 목욕을 대신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무의식은 그 소리를 누가 내는지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을 겁니다. 제가 그 소리를 어떻게 잊겠는 지요. 저는 이부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세면장 앞으로 걸어갔어요. 바깥은 여전히 눈보라가 치고 있더군요. 마당에 쌓인 눈빛으로 인해 불을 켜지 않아도 거실이 환했습니다. 쌓인 눈들이 바람에 일렁거리는 기척이 거실에 쳐놓은 블라인드에 그림자로 비치고 있었습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는 계속 들렸어요. 딸아이는 욕조에 들어가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늘 제 팔꿈치를 담가봐서 따뜻한 정도에 물의 온도를 맞춰주곤 했지요. 물속에 조그만 튜브를 넣어주면 그 분홍색 조그만 손으로 튜브를 낚아채려다 놓치고 또 낚아채려다 놓치면서 까르륵 웃곤 했어요. 제깐엔 장난을 친다고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제게 뿌리거나 그 말랑말랑한 발을 들어 첨벙첨벙거리기도 했지요. 저는 세면장 문고리 앞에 십여 분 서 있었습니다. 물기에 젖어 있는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넘겨주는 순간을 저는 좋아했습니다. 깨끗한 이마 위에 보송한 솜털을 보는 일도요. 납작한 콧망울에 묻어 있는 물기를 닦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는 일도요. 겨드랑이 밑에 여전히 귀를 닮은 날개가 달려 있었지요. 그 날개를 건드리면 딸아이는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곤 했습니다. 수술을 못 하면 어떠랴, 싶었어요. 이렇게 작고 예쁜 날개를 아무나 가지랴. 아이를 씻겨 타월에 감아 품에 안는 일도 참 좋았습니다. 사람의 살 냄새가 그렇게 향긋할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죠. 세면장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저도 모르게 남편을 불렀어요. 여보, 여보, 여보, 몇 번이나 큰 소리로 불렀어요. 남편이 방문을 열고 나와 저를 쳐다봤어요.
 “이리 와봐요.”
 “ ……
 “물소리가 들려요.”
 “……
 “목욕을 하고 있다구요.”
  남편이 제게 다가왔을 때 욕조에서 들리던 물소리는 뚝 그쳤어요. 저는 머쓱해졌죠. 그래도 남편이 세면장의 불을 켜려는 걸 말렸어요. 어쩐지 불을 켜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둠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남편이 이번엔 세면장의 문을 열었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세면장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흰 눈빛이 욕조를 희뿌옇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어요. 변기며 샤워기며 수건걸이며 타일은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채 잠잠했습니다. 샴푸, 린스, 오일이며 보디 클렌저가 담긴 바구니도 잠잠했고, 벽에 부착시켜놓은 칫솔이 들어 있는 칫솔 소독기며 헤어드라이어가 담긴 작은 바구니도 잠잠했어요. 흰 타월도 착착 개어진 채 잠잠했어요. 남편의 전기 면도기조차도요. 딸아이가 가지고 놀던 선반 위의 파란색 튜브에 창으로 들어온 눈빛이 비쳤습니다. 튜브를 한참 바라보다가 저는 남편이 세면장 문을 다시 닫기 전에 제가 자고 있던 방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어요. 방문을 열다가 돌아보니 남편이 저를 쳐다보고 있더군요.
 “눈보라치는 소리를 잘못 들은 걸까요?”
  남편은 대답 없이 그냥 서 있었어요. 저는 거실로 다시 나와 베란다 쪽으로 가서 블라인드를 들쳤습니다. 남편도 따라 나와 제 옆에 섰지요. 우리는 그렇게 선 채로 마당을 내다봤어요.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눈 위에 발짝을 새기며 모과나무 밑을 지나갔어요. 꼬리로 눈을 다 쓸어내면서요. 바람이 거칠어질 때마다 모과나무가 휘어지고 쌓여 있던 눈이 사방을 펄럭거렸습니다. 눈보라를 바라보며 그렇게 오 분쯤 서 있었을 거예요. 딸아이가 그리 되고 난 후에 한 곳을 바라보고 우리가 그렇게 서 있기는 처음이었지요. 자꾸만 가슴이 미어지는 게 더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저는 남편을 베란다에 두고 제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잠자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저는 몸을 오그린 채 창문에 어리는 눈 그림자를 바라보며 남편이 베란다에서 방으로 걸어들어가는 소리를 들었지요. 다시 잠들어보려고 열다섯, 열여섯…… 눈 그림자를 세어봤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저는 눈짐작으로 더듬거려 책꽂이에서 쇠라의 화집을 꺼내들고 창가로 다가가 엎드렸습니다. 불은 켜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천지에 내리고 있는 눈빛에 의해 방안이 밝아왔지요.


선생님 혹시 쇠라의 그림 중에서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란 그림 생각나시는지요?
1886 8월에 그린 그림이니 백년도 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 제 언니가 화가라는 말씀은 드렸던가요?
비싼 값은 아니지만 작품을 만들어 화랑에 내놓으면 그럭저럭 사가는 사람은 있는 그리 유명하지도 그렇다고 완전 무명도 아닌 화가지요. 쇠라의 화집은 언니 거였어요. 딸아이를 잃은 밤에 화실 겸 숙소인 언니에 집으로 가서 보름쯤 묵었을 때 어느 날 우연히 쇠라의 화집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화집을 넘기다가 어느 그림 앞에서 제 시선이 딱 멎었어요.


 
흰옷을 입은 소녀.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습작. 1884~1885. 데생. 30.5×23.5cm.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소녀가 어슴프레한 빛 속에서 흰 모자를 쓰고 민소매 옷 밑에 흰 팔을 감추고 허공에 떠 있는 듯이 서 있었어요. 데생이라서 그랬겠지요. 흰 모자는 있고 얼굴은 없는 소녀, 민소매 옷은 있고 팔은 없는 소녀, 무릎 위의 흰 치마는 있고 다리는 없는 소녀. 형체가 없이 흰빛에 싸여 있는 소녀를 바라보는 사이 제 입술은 떨리고 마음은 한없이 외로워졌습니다. 그제서야 앞에서 무심코 스친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란 그림을 다시 되넘겨 살펴보았어요. 숱하게 보아서 무심코 넘겼던 그림이었습니다. 휴일 오후에 그랑드 자트 섬으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각자의 포즈로 앉아 있거나 서 있었지요. 물이 흘러가는 숲속에 있는 사람들은 얼핏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 과장되게 부풀린 옷을 입은 젊은 부인, 끈에 묶여 산책에 나선 원숭이, 먼 풍경으로 악기를 불고 있는 남자…… 사이사이에서 저는 흰옷을 입은 소녀를 찾아냈습니다. 여기 있구나, 저절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소녀는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맨 중앙에서 양산을 쓴 젊은 엄마의 손을 잡고 서 있었어요. 그렇게 여러 번 본 그림인데도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소녀였습니다. 독립된 흰옷을 입은 소녀에서는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안에서와는 달리 소녀는 흰 모자 밑에 분홍색 얼굴이, 흰 소매 밑에 길다란 팔이, 흰 치마 밑에 어여쁜 종아리가 있었어요. 소녀의 형체를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지만 그제서야 저는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속의 등장인물들이 거의 표정이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울 것 같은데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경직되거나 무표정이었죠. 그런 표정 없는 사람들 속에 소녀는 신비하게 혹은 수수께끼 속의 인물처럼 서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장 중심에 서 있는데도 보일 듯 말 듯한 흰옷을 입은 소녀를 바라보며 그날 저는 많이 울었어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언니 집에서 떠나 올 때 쇠라의 화집을 들고 왔지요. 막상 가지고 나왔으나 다시는 펼쳐보지 않았던 화집을 그날 밤에 저는 다시 펼쳤어요. 방안을 밝혀주는 눈빛에 의지해 화집을 한 장 한 장 넘겨 흰옷을 입은 소녀를 찾아갔습니다. 딱 한번밖에 본 적이 없는 소녀가 목이 메일 만큼 그리웠어요. 눈보라치는 밤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흰옷을 입은 소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흰빛에 싸여 있었어요. 무슨 바람이 그렇게 부는지요. 모과나무가 뽑혀 날아가고 현관문도 떨어져 날아가고 지붕도 걷어져 날아가고 종내엔 집 전체가 날아가 버릴것만 같은 밤이었습니다. 눈보라치는 소리를 들으며 저는 흰옷을 입은 소녀의 형체 없는 얼굴에 제 얼굴을 대고 있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아요. 문득 깨어나서 소녀에게서 제 얼굴을 떼었을 때는 창문에 어지러운 눈 그림자가 사라지고 천지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릴 것 같이 불던 바람도 그쳐 있었습니다. 사방이 고요했습니다. 소녀의 얼굴에 제 뺨을 대고 다시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어요. 그 소리. 다시 바람이 부는가도 싶었고 모과나무 밑에서 떨고 있는 고양이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광덕고개를 종주할 때 쌓인 눈이 러셀을 밟힐때 나던 소리 같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저는 섬뜩했습니다. 그 소리는 제 딸아이의 옹알이 소리였어요. 저는 화집을 든 채로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딸아이의 옹알이 소리가 분명했어요. 어느 해, 저물 무렵 제 등에 업혀 있던 딸아이가 처음으로 옹알이를 했을 때 그 기쁨을 제가 잊었겠습니까. 그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뭐라 하는데 저는 너무나 놀라서 그만 칼질을 하고 있다가 손을 베어버렸지요. 세상을 향해 뜻도 없이 처음 내뱉어보는 아이의 젤리같이 말랑말랑한 사랑스러운 옹알이를 제가 잊었겠는지요. 그저 부드럽고 투명했던 그 소리를요. 맑디맑은 물이 찰랑거리며 제 얼굴로 흘러오는 것 같은 생생한 기쁨을 주었던 그 소리. 훗날 딸아이는 그 옹알거리는 소리를 냉장고 안에서 맛난 것을 꺼내 먹여달라는 말 대신으로 썼지요. 딸아이가 냉장고 앞으로 기어가서 냉장고 문을 그 조그만 주먹으로 두들기며 옹알거리면 저는 함빡 웃으며 딸기를 꺼내 으깨주기도 하고 요구르트를 꺼내 떠먹여 주기도 했죠. 반은 제가 먹었지만은요. 제가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 남편도 막 저쪽 방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어요. 우리는 뭐랄 것도 없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동시에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앞에 섰지요. 불을 켜려던 남편에게 제가 불 켜지 말아요, 외마디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쩐지 불을 켜면 소리가 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남편과 내가 냉장고 앞에 섰을 때 그 소리는 끊겨 있었습니다.
 “당신도 들었나요?”
 “당신도?”.”
  저는 차마 딸아이의 옹알이 소리였다는 말은 못 했습니다. 남편도 제게 차마 못 하는 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당에 쌓여 있는 눈빛이 거실을 환히 비추고 있었어요. 남편이 냉장고의 냉장실과 냉동실 문을 동시에 열었어요. 버섯이나 멸치 혹은 숙주나물이 담긴 반찬통들, 배추김치가 담긴 커다란 통과 깍두기가 담긴 작은 통, 냉동실의 삼치나 동태 병어 그리고 연어 한 조각, 들깨며 생강가루 인절미 얼려놓은 것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요구르트, 흰 우유, 맛살, 사과와 멜론 반개까지도. 야채칸에 넣어놓은 포도즙과 쑥을 다려 팩에 넣어놓은 것이며 상추, 쑥갓, 배추 반포기도 보였어요. 무의 가운데 토막도요. 소리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냉장고 안에서 흘러나온 노란 불빛만이 남편과 나의 맨발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발은 추워 보였습니다. 저는 객쩍어져서 우유팩을 꺼내 입에 대고 반쯤 마시고는 당신도 마실 거냐는 뜻으로 우유팩을 든 채 남편을 쳐다봤습니다. 남편은 고개를 저었어요. 냉장실과 냉동실 문을 닫자 불빛이 사라지고 부엌은 다시 어두워졌어요. 냉장고는 조용히,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어요. 우리는 어두운 부엌 냉장고 앞에 길을 잃은 사람들처럼 서 있었습니다.
 “잊고 있었어…… 그날이 오늘이더군.”
 “……
 “당신은 알고 있었어?”
 “.”
  딸아이가 떠나고 남편과 딸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우리는 더 이상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의 무게를 못 이겨 툭툭 가지가 부러지는 겨울 산의 나무들처럼 냉장고 앞에 부러졌습니다. 베란다 블라인드에 다시 눈 그림자가 어리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하얗게 쌓여 있는 눈빛이 부엌 창으로 새어 들어와 부엌이 하얘질 때까지요. 식탁 의자의 윤곽이 보였고, 식탁탁자 위에 놓여 있는 맛소금이며 후추가 들어 있는 조그만 은색통도 보였지요. 저는 생각난 듯이 무릎을 모으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쇠라의 화집을 남편에게 보여줬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겨 흰옷을 입은 소녀를 남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형체가 없는 소녀를 먼저 보여주고 다시 앞장을 넘겨 완성된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물었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했어요?”
 “……
 “?”
 “산에 묻었어.”
 “혼자서요?”
 “.”
 “어느 산에요?”
 “산에.”
 “어느 산에요?”
 “산에.”
  산에. 그래서였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산에만 가면 눈 내리는 산에만 가면 외려 따뜻하고 마음이 평온했던 것일까요. 무엇인가가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딸아이였을까요? 그 애가 그렇게 항상 제 곁에 따라다녔던 것일까요. 부엌 창으로 들어온 눈빛에 비친 남편의 얼굴을 바로 보았습니다.
연신 산에……라고 대답하던 남편은 울고 있었어요.
딸아이를 잃고도 어디 하나 흐트러지지 않던 남편,
오히려 모든 일상을 더 단정히 잘 꾸려나가던 남편이 단추가 두 개나 풀린 구겨진 잠옷을 입고 입을 비틀며 울고 있었어요. 혼자서 죽은 딸아이를 산에 묻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승진 시험을 보고 헤드헌터를 통해 연봉이 더 많은 곳으로 회사를 옮기던 남자가 종내엔 제 품에 와락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었어요. 제 잠옷 앞자락이 흠씬 젖도록요.
눈보라는 그쳐 있었고 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에서 태어난 흰빛은 거실을 지나 부엌까지 들어와
남편을 하얗게 비추었습니다. 이 눈물을 다 감추느라고 제가 산에 다니는 동안 이 남자는 그리 반듯하게 살았던 게지요. 제사를 지내고 다름없는 표정으로 친구들을 만나고…… 그칠 줄 모르는 남편의 눈물을 바라보며 그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수행하기가 저처럼 아예 안 하기보다 훨씬 힘들었겠구나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알게 해주려고 방문객은 그 세찬 눈보라를 뚫고 찾아온 것이었어요.
우는 남편을 같이 껴안았습니다. 가엾은 사람. 저는 두 개나 풀려 있던 남편의 잠옷 단추를 마저 풀고 남편의 가슴에 제 얼굴을 묻었습니다. 남편은 형편없이 야위어 있었습니다. 제 손가락에 툭툭 뛰어나온 그의 등뼈나 손목뼈가 잡혔습니다. 남편이 제 가슴을 찾아 쥐었고 우리는 눈빛이 하얗게 퍼진 부엌의 냉장고 앞에서 이 년 만에 사랑을 했습니다. 남편의 야윈 뼈들이 흰 눈빛을 받으며 조용히 움직이다 이따금 냉장고에 부딪혔지요. 그의 따뜻한 입김이 제 마음속의 모래펄까지 퍼져오는 듯싶었을 때 저는 남편의 귀에 대고 속삭였지요. 흰옷을 입은 소녀는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 있다고, 언젠가 꼭 한번 가보자고.


                                              *


  이제 제 이야기는 다했습니다. 제가 오늘 병원에 간 연유는 며칠 전부터 구토가 나고 속이 메스꺼워서였습니다. 눈보라를 뚫고 제게 왔던 방문객이 구월이면 태어난다고 합니다. 병원 담장을 에워싸고 있는 개나리에 움이 트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하늘은 눈을 뿌리고 있는데 아랑곳없이 나무는 움을 틔우고 있더군요. 한 개 한 개의 움은 곧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어요. 병원에 오기 전엔 세상의 나무들이 이렇게 서로 아귀다툼하듯 봄을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산 위의 눈도 녹았을까요. 제가 봉우리에 기암괴석에 병풍바위에 새겨놓았던 딸아이의 이름도 녹았을까요. 간혹 덧붙이곤 했던 너를 잊지 않았다, 라는 문장도 물이 되었을까요. 병원을 나와서 삼월의 때늦은 눈이 흩뿌리는 도시의 가로수 밑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습니다. 어쩌면 이번 겨울의 마지막 눈일지도 모르지요. 병원 뜰의 개나리만이 아니라 가로수에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도 눈 속에서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중이더군요. 이제 곧 그 움에서 어린애 손바닥 같은 은행잎이 돋겠지요. 이제 곧 어린애 귓불 같은 진달래가 피겠지요. 연이어 연이어 백목련이 자목련이 앞뒤로 피고 산수유가 질 때쯤이면 산속의 다람쥐들은 가시덤불 속의 붉은 딸기를 쪼아 먹겠지요. 다 쓰고 나니 깊은 숨이 나오는 군요. 어쩌면 선생님이 제 이야기를 읽고 글로 써주시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방금 오래 전에 제가 교정보았던 선생님의 글을 찾아봤습니다.
선생님의 글쓰기에 대한 꿈의 한 대목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불러와 유연하게 본질에 닿게 하고 자연의 냄새에 잠기게 하고 싶은 꿈. 그렇게 해서 이 순간을 영원히 가둬놓고 싶은 실현 불가능한 꿈. 지금도 그때와 같은 생각이시면 제 마음을 헤아려주시리라 여겨져요. 제 개인적인 바람은 어쩔 수 없는 상실로 마음을 닫아건 사람들에게 눈보라를 뚫고 우리를 찾아왔던 방문객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은 것, 그것뿐입니다. 오늘 이른 오전 시간에 병원에 갈 때까지만 해도 저 자신조차도 그 방문객이 진짜 우리를 찾아왔었는지 환영이었는지 분간이 안 갔습니다만 지금은 그날 밤 우리를 찾아온 방문객의 존재를 따뜻하게 느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백선의 흰뿌리가 땅속에서 살이 찔 때까지는 봄이 와도 눈이 살짝 쌓인 산길은 조심하세요, 선생님. 그 밑이 반질반질 얼어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럼 안녕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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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딴방 ” “ 엄마를 부탁해 의 작가 신경숙의
“ 딸기밭 이라는 단편 모음집 중에서 비교적 짧은 내용이라 전문을 옮겨 봤어요
신경숙...작가는 아시죠? 2015년에 일본 작가의 표절 파문으로 아주 시끄러웠던..
한 작가의 진가는..아니 모든 예술의 진가는 작품에 쏟아낸 오랜 시간의 앙금으로 분명해지는 것이
참된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사람도, 사랑도....아주 오래된...그래서 낡고 너덜해져서 투명히 그 영혼이 비추어지는 듯한..ㅎㅎ
대체로 신경숙 작가의 작품은
인간 내면을 향한 깊은 시선
상징과 은유가 다채롭게 박혀 빛을 발하는 문체
정교하고 감동적인 서사 이런 평을 받아요


본문에도 잠깐 등장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자, 혹은 다가 설 수 없는 것들에 다가서고자 하는 소망
더듬더듬 겨우 말해 나가는 특유의 문체로 슬프고도 아름답게 형상화 했다고 하죠
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자, 혹은 다가설 수 없는 것들에 다가서고자 하는 소망"‘ 이 품고 있는
주제 속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간과 유착 사람과 신 혹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거리의 길이 이런것들을
읽어 볼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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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신은....


식탁앞에 우리가 아주 먹기 어려운 슬픔이라는 음식을 풍성히 차려놓고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통스럽게 삼켜 내고 있는지 어떤 얼굴로 소화 해내는지
키득 거리며 뻔히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는 계모처럼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부부라는 공동의 시간 앞에
신이 던져놓은 상실의 참절한 아픔을 헤쳐 나갈 때
배우자에 대한 서로 배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걸까요
스스로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길이 되고 구원이 되는
모습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요...


그저 아픔에 어쩔줄 모르고 그냥...산으로..들로...정신을 놓아 버리는 일 말고
내가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목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랑은 늘 왜 그렇게 먼길을 돌아서 와야 하는 걸까요.


혹시 몰라
아무 화가의 화보집 하나 사두어야 할까 봐요 나중에 라도 부부가 서로 어색해지면
냉장고 앞에서 같이 한번 넘겨 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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